박철우 집필위원장 에세이 1편

이미지 출처 – pixabay

 

오래된 가족 앨범을 정리하다가, 일제강점기 말 무렵에야 겨우 시작되는 부모님의 사진 몇 장과 마주쳤다. 눈을 치켜뜬 채 군복을 입은 아버지, 학창 시절 테니스를 치던 어머니. 돌아가신 지 30년이 다 된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몇 해 전부터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젊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문득 살아생전 아버지가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딴 회사나 남 얘기만 쓰지 말고 내 얘기 한번 써 봐라. 그만한 역사도, 그런 기막힌 소설도 없을 거다.” 그 말을 새삼 떠올리며 아버지의 전기를 쓰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생각에는 이르렀다 — 크든 작든, 유명하든 아니든, 어느 기업이나 단체든 개인이든, 지나온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는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는 것.

이 생각은 30여 년 전 도쿄에서 겪은 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초 사사(社史)와 자서전을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 이케부쿠로의 한 대형서점에서 ‘기업의 역사’ 코너를 보았다. 300년 넘은 소기업부터 세계적 대기업까지, 수많은 사사가 꽂혀 있었다. 바로 옆에는 ‘개인의 역사’ 코너가 있었는데, 천 년 전 위인의 평전부터 스무 평 남짓한 정원을 가꾼 어느 주부의 책까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매출 10억 원도 안 되는 작은 회사의 사사나 평생 우체부로 일한 이의 자서전이 실제로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참 아름다운 말과 글을 가진 민족이면서도, 조선 왕조 말부터 일제강점기와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기록’에는 유독 인색해졌다. 반면 일본은 작은 구멍가게조차 100년, 200년 치 기록을 보존하고, 걸핏하면 메모를 남기는 문화를 갖고 있다. 그 차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유효할 필요는 없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의 99.9%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지금의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록이었다. 그 옛날에도 기록의 가치를 알았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 가치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서 마주하는 기록의 모습은 이 믿음과 자주 어긋난다. 내가 처음 사사 작업을 접한 것은 1991년, 박사과정을 밟으며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생계를 잇던 때였다. 사사 업계에 먼저 발을 들인 선배의 권유로, 경기도 안산의 한 금속제조업체 자료보관실을 찾았다. 마스크를 쓰고 들어간 그곳은 회사 설립 후 30년간 쌓인 서류들이 버릴지 말지 결정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는 창고에 가까웠다. 연도별 생산실적표와 옛 직원들의 행사 사진 사이, 색이 바랜 1960년대 초 장관 표창장까지 — 수백 건의 자료를 사흘 만에 찾아냈다.

몇 달 뒤 완성된 사사(社史)를 받아 보고서야 그 노력의 결말을 알았다. 전체 250쪽 가운데 정작 창업 초기, 즉 1960~70년대 초의 기록은 50쪽에 그쳤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였음에도 초기 자료는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연도조차 적히지 않은 상자들이 그 방증이었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그 시절을 몸으로 겪은 퇴직 직원이나 경영자의 구술(口述)조차 충분히 담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류로 남지 않은 기억도 분명 역사의 일부일 텐데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줄곧 같은 질문을 안고 살아왔다. 기록은 어디에서 새어 나가는가.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체계적으로 남기는 방법을 몰라서 사라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 회사의 역사든 한 개인의 삶이든, 그 가치는 이야기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기록하고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 30년의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당신의 회사가 걸어온 길, 당신이 살아낸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가치 있다.

 

  • 본 글은 박철우 작가의 블로그 ‘사사·자서전 도슨트 박교수의 작업실’(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profstory&tab=1)에 실린 <당신의 회사, 당신의 기억은 ‘기록’이어야 할 충분하고도 아름다운 가치다>,  <II. 역사 혹은 사사 혹은 자서전- Connects past & future(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다) > 포스팅을 재편집했습니다.

 

Leave a Reply